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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2차 민주콩고 내전 (1998~2003) : 발생 배경

정치경제/민주콩고

by DAVID Y 2025. 2. 19.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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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아프리카 연구소 선임연구원 윤용섭 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민주콩고 내전 2번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1차 내전이 민주콩고 2대 대통령 모투부의 독재를 막고 새로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쿠데타 성격이었다면, 

2차 내전은 사실상 '아프리카 版 세계전쟁' 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피해를 낳은 전쟁이었습니다.

일부 통계에 따르면 민주콩고 2차 내전은 세계대전, 한국전쟁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이라고 합니다.

 

앞선 포스팅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민주콩고 내전 발생 배경에는 이웃한 두 나라 '르완다(Rwanda)와 우간다(Uganda)' 가 있습니다. 

 

벨기에 식민통치 시기 : 정권 앞잡이 투치, 다른 부족을 핍박하다

 

먼저 르완다는 오랜 기간 벨기에 통치를 받았습니다. 식민통치 기간 벨기에 정부는 관리 편의를 위해 '투치(Tutsi)' 라는 부족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즉, 벨기에 정부에서 일일이 모든 부족을 관리하기 어려우니 투치 부족에게 관리 전권을 위임한 겁니다. 일종의 조선총독부 시절 '조선인 경부(경찰 간부)' 정도로 보면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벨기에가 투치족을 지원한 이유는 다른 부족과 달리 팔다리가 길고, 유럽인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업무 이해력이 높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독일의 '인종주의' 를 활용하여 르완다 부족 간 갈등을 조장하고 식민통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후투족(Hutu)'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벨기에의 이런 민족 편가르기 정책은 향후 르완다 내전, 학살의 주요 원인으로도 작용합니다.

영화 '호텔 르완다' 의 주인공 부부 폴(오른쪽)과 타티아나(가운데). 폴은 후투, 타티아나는 투치입니다. 얼굴 생김새 차이가 보이시나요?

독립 후 벨기에가 떠난 자리 : 투치에 대한 복수를 시작하다 - 1차 학살

 

벨기에의 지원을 등에 업은 투치는 본격적으로 후투족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후투족 부족장 지위를 없애고 정부 주요보직에서 배제하는 한편, 같은 자리에 투치족 사람들을 대거 기용했습니다. 자연히 여러 부족들로부터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벨기에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각종 무기로 투치는 이들을 모두 강경 진압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60년대 아프리카 전역에 식민통치 해방 움직임이 있었고 이 시기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쌓였던 후투족들의 분노는 투치로 향합니다. 대대적인 '투치 사냥' 이 시작되었고, 독립 후 무정부 상태와 다름 없던 르완다 학살은 벨기에 정부의 중재가 있기까지 한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식민통치기간 투치를 지원했던 벨기에가 이번에는 독립정부 실세로 등극한 후투족을 옹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벨기에 정부에게 필요한 건 르완다의 광물자원이었습니다. 누가 되었건 자신들의 광물 개발에 도움이 되는 쪽이면 독재건 학살이건 벨기에는 상관하지 않았을 겁니다.

경제위기, 또 한 번의 학살로 상황을 반전시키다 - 2차 학살

 

대규모 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투치족들은 인근 민주콩고, 우간다로 피신을 갔습니다. 피신 행렬에는 당연히 투치족 군인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이 우간다로 넘어가 만든 조직이 '애국전선' 입니다. 민주콩고에도 많은 군인 출신 투치족들이 넘어갔지만 대부분 임시 난민캠프에 거주했고 애국전선처럼 큰 규모의 조직을 형성하지는 못 했던 것 같습니다. 한 차례 '인종 청소' 가 끝난 르완다는 이제 온전히 후투족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원했던 평화는 오래가지 못 했습니다. 주력산업이었던 농산물 시황이 악화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후투족들 사이에서도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또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서 쿠데타 물결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으니 르완다 정부는 그야 말로 매일 매일이 가시방석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마침 위기의 순간, 후투 정부에 한 차례 '반전의 기회' 가 찾아 왔습니다.    

1994년 당시 '쥐베날(Juvénal Habyarimana)' 르완다 대통령은 부룬디 대통령과 함께 해외 순방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르완다 키갈리(Kigali) 공항으로 착륙하던 비행기가 누군가에 의해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고로 두 대통령은 물론 같은 비행기에 타고 있던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항공기 격추사건을 브리핑하던 정부 대변인이 이번 사건 배후에 투치족이 있다고 발표를 한 겁니다. 가뜩이나 일자리는 없는데 경제 사정도 안 좋고, 온갖 불만이 쌓여 가던 후투족들은 '이번에야 말로 투치족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 는 생각으로 다시 한 번 대규모 학살을 자행합니다. 하루 아침에 르완다는 이웃이 이웃을 죽이고, 선생이 학생의 배를 가르며, 어른아이 할 것 없이 투치족 여성들을 강간하는 광기의 현장으로 변했습니다. 그렇게 후투족의 강간으로 탄생한 아이만 2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도시는 총이 있고 잘 드는 칼이 있어 '다행' 이었습니다. 지방에서는 제대로 된 무기가 없으니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 '마체테(Machete)' 라는 벌목용 칼을 사용해 목을 자르거나 시신을 난도질했습니다. 당시 참상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 [호텔 르완다] 를 통해 일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994년 학살 피해자 시신을 땅에 묻는 모습. 당시 학살로 약 80만명의 투치족이 사망했다고 한다. 

투치의 반격 - 후투 피난 그리고 또 다른 군조직 창설

 

2차 학살을 피해 투치족은 다시 한 번 피난길에 올라야 했지만, 이들에게는 독립 후 우간다에 자리 잡은 '투치족 선조들' 이 있었습니다. 이들 선조들은 우간다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애국 전선' 이라는 제법 체계적인 군사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학살을 방관할 수 없던 애국전선은 정예병력을 동원해 르완다를 공격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르완다 정부가 우간다 손에 넘어가는 일은 없었지만, 많은 후투족 인사들 역시 피난/망명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투치족과 마찬가지로 이들 피난 행렬 역시 군출신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고, 그 중에는 '인테라하므웨(Interahamwe)' 라는 비공식 무장단체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과거 투치족 선조들이 우간다에 숨어 힘을 키웠던 것처럼, 민주콩고-르완다 국경 '북키부(North Kivu)' 인근에 거주하며 조직 재건에 힘썼습니다. 애국전선이 우간다의 지원을 받았다면, 후투 무장단체는 피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르완다 정부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민주콩고 (당시 국명 '자이르') 정부의 지원까지 더하여 공식 '반군 부대' 가 탄생했는데, 그게 바로 민주콩고 3대 대통령 '로랑 카빌라(Laurent Kabila)' 를 지도자로 추대했던 '민주해방연합군(ADFL)' 입니다. 

 

민주콩고 2차 내전의 씨앗

 

정리하면,

르완다 학살을 피해 도망친 투치족의 군대 '애국전선' 과 애국전선의 반격으로 피난/망명길에 오른 후투족의 '민주해방연합군'. 이 두 조직은 묘하게도 1996년 '모부투' 정권에 맞선 로랑 카빌라의 쿠데타 성공 주역이 됩니다.

 

하지만 모든 정부간 지원에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다. 앞서 두 조직은 카빌라의 쿠데타가 성공한 후부터 각종 이권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권 사업을 나눠 갖는 것까지는 참을만 했는데, 나중에는 그 수위가 내정 간섭으로까지 이어지자 카빌라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결정적으로 민주콩고 내에서까지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무력 분쟁이 발생하자 카빌라는 마침내 르완다 출신의 모든 병력, 그리고 애국전선을 남 모르게 지원하고 있던 우간다 세력까지 모두 자국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자신들을 '개국공신' 으로 여기고 있던 르완다와 우간다 양국은 당연히 모든 이권 사업을 포기하고 물러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국 카빌라는 정부군까지 동원하여 이들 세력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이 싸움이 격화되어 결국 1998년 민주콩고 2차 내전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P.S.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치족은 생업만 다를 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일문화권 부족이었다는 점입니다. 벨기에의 '편가르기' 정책이 없었다면 두 부족은 사실상 대규모 학살이나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이들 부족 갈등이 군대를 만들고 서로 총칼을 겨누며 전쟁까지 만들어 낸 겁니다. 그럼에도 벨기에 정부는 먼 발치에서 '양쪽 가운데 더 쎈 놈' 만 찾아다니며 열심히 합법적으로 광물자원을 수탈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수 없이 반복 언급하겠지만, 아프리카의 아픔은 비단 그들만의 탓이 아닙니다. 어찌보면 아프리카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줄곧 '서구 열강', 그리고 '중국, 러시아' 라는 대국의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대국들이 일부 권력자와 붙어 먹으며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는 동안 일부 시민들은 집주소, 시민권도 없이 자신들이 왜 가난한지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포스팅, 그리고 앞으로의 포스팅이 아프리카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선입견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길 희망하며 이번 글을 마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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