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마이아 왕조 치하에서 많은 베르베르인들이 무슬림 민족이 되어 갑니다. 하지만 베르베르는 자신들만의 고유 문화가 있기 때문에 무슬림화 되어 가는 정권에 불만이 많았는데요, 그럼에도 우마이아 왕조의 알제리 통치는 그 후로도 약 100년을 이어 갑니다. 그후 격변의 세월을 거쳐 바야흐로 16세기, 오스만 지역에서 해적 바르바로사(or 바르바로스)가 2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알제리를 침공합니다. 붉은 수염이라는 뜻의 바르바로사는 오스만 술탄의 지원으로 정규군 2천명을 얻어 손쉽게 알제리를 점령합니다. 대부분 바르바로사 인물 한 사람을 기억하지만 사실 이들은 형제 해적단이었습니다. 그런 해적이 알제리를 침공했을 당시만 해도 그의 통치가 300년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죠. 그는 알제리를 통치함과 동시에 자신을 '술탄' 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런데 웃긴 건, 정작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자신을 동로마 제국의 황제라고 칭하는 걸 더 좋아했다고 하죠.
오스만 제국의 섭정 말년,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새 정권이 들어섭니다. 하루 아침에 황제가 자리에서 물러나 감옥살이 하고 있으니 국내 정세도 엉망이었습니다. 보통 국내 정세가 어지러워 중앙집권화 통치가 어려울 때, 당시 유럽 국가에서 자주 하던 짓거리가 있습니다. 바로 전쟁이죠. 전쟁으로 국민들의 시선을 잠시 해외로 돌릴 수 있고, 국가 비상사태를 핑계로 국민들의 자유 또한 제한할 수 있으니 모든 군주에게 전쟁은 필요악이었습니다. 게다가 전쟁을 하는 동안에는 보수파가 우세하여 정권 교체에 대한 우려도 해소되니 전쟁은 그야 말로 군주제 사회에서 만병통치약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처럼 프랑스도 당시 불안했던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전쟁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실각 후 첫번 째 정복 대상으로 알제리를 선택합니다.
프랑스는 먼저 수도 알제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시디 페루지' 라는 곳에 상륙합니다. 이때가 1830년입니다. 오스만도 이를 불 보듯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겠죠. 역시 군사를 보냅니다. 하지만 당시 오스만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터라 알제리에 주둔하는 병사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열심히 박박 긁어 모아 나름 대군을 형성하죠. 당시 오스만측 병사 숫자는 오스만 정규군 7천에 콘스탄틴 주둔 병력, 카빌 용병까지 포함하여 총 4만3천의 부대를 만듭니다. 반면, 프랑스는 배 타고 오느라 실어 나를 수 있는 군대가 많지 않았겠죠. 총 3만 4천의 군대가 오스만 병력에 맞서 싸웁니다. 아니 반대로, 오스만이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웠다는 표현이 맞겠죠.
병력 수로 보면 오스만 측 군대가 우세했지만 결과는 허무하리 만큼 프랑스의 압승으로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물론 오스만이 예전처럼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지도 못 했고, 당시 오스만을 둘러싼 국외 정세가 불안한 탓에 늘 앞뒤 전쟁에 시달리느라 사실 알제리에 큰 관심을 두지도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정규군은 대부분 본토 혹은 주요 격전지에 남고 알제리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 놨으니, 당시 나폴레옹 치하 수 많은 전투 경험을 갖고 있는 프랑스 전사들을 상대로 이긴다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죠. 어쨌든 그렇게 길고 길었던 약 300년의 오스만 섭정이 끝나고 이제 알제리는 유럽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압델카데르 이븐 무히딘 (Abdelkader Ibn Muhieddine), 19세기 중반 프랑스 식민지배에 맞서 싸운 알제리 독립투사 중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압델카데르는 1908년 '슈라파'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슈라파 가문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을 주장하는 알제리 명문가입니다. 1830년 초 프랑스의 침공 및 오스만 제국의 몰락으로 알제리 사회는 정치, 문화, 사회, 군사 전반에 걸쳐 큰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에 지역 주민들의 간절한 청원으로 압델카데르가 최초 독립전쟁 선봉에 서며 '에미르' 라는 호칭을 얻게 됩니다. 에미르는 '지도자' 라는 뜻입니다. 에미르의 목표는 단 하나 였습니다. 오스만도 싫고 프랑스도 싫다. 우린 독립을 원한다!
많은 사람들이 1830년 프랑스 침공과 함께 알제리 식민지가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1830년 후반까지 프랑스는 알제리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 했습니다. 즉 알제리 침공 이후에도 크고 작은 독립전투가 있었고 그 중심에는 항상 에미르가 있었습니다. 에미르 독립군의 저항이 예상보다 거세자 프랑스 대표는 이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합니다. 이름하야 1837년 타프나 조약입니다. 타프나 조약으로 프랑스는 알제리 해안과 일부 주요도심 지역에 대한 지배권만 갖고 나머지 2/3에 해당하는 땅은 모두 알제리 자치령으로 남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에미르는 중서부 티아레 (Tiaret)를 수도로 삼고 새 국가 건설에 힘씁니다. 하지만 프랑스가 그렇게 정직한 나라는 아니죠. 당연히 얼마 못 가 타프나 조약을 일방적으로 폐지 통보합니다. 그렇게 다시 피 터지는 싸움이 재개되었죠.
에미르 군대는 프랑스군의 거센 공격에 게릴라로 대응했지만, 그럴수록 프랑스 군대는 더욱 무자비하게 알제리 사람들을 진압하며 마을을 초토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농작물과 가축이 모두 불타고 주민들은 산산히 흩어지며 에미르 군대도 점차 힘을 잃었죠. 결국 에미르 역시 프랑스군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에미르를 처형할 수 없었습니다. 에미르를 중심으로 잔재세력이 독립운동을 재개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그보다 알제리 정신적 지주인 에미르를 처형한 후에 후폭풍을 더욱 두려워한 것이죠. 이에 프랑스 정부를 에미르를 프랑스로 망명시켜 주겠다는 조건으로 에미르를 알제리에서 빼내기로 합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역시 약속을 지키지 않죠. 프랑스에 도착함과 동시에 에미르와 그의 가족들은 모두 감금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852년 절대 알제리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프랑스 정부는 에미르 석방을 허가합니다.
에미르는 프랑스 감옥에서 풀려난 후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망명생활을 이어갔으며, 그곳에서도 종교적 지도자로 인정받으며 받은 제자를 양성하고 평온한 여생을 보내다 1883년 사망합니다. 에미르가 지금까지도 알제리 종교 지도자로 이름이 회자되는 이유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넘어 범 인류애를 실천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1860년 시리아에서 이슬람 시아파 무리들이 기독교인들을 습격하고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에미르는 이때 많은 유럽인과 기독교인들을 대피시켜 1만5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전 세계 많은 국가 원수들로부터 감사와 존경을 받았고, 세계적인 영웅으로 칭송되며 유럽 국가들로부터 많은 훈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에미르는 이러한 찬사에 '신앙인으로서 의무를 다했을 뿐' 이라며 겸혼하게 화답했다 합니다.
그로부터 또 한참의 시간이 흘러, 1966년 7월 5일, 알제리 독립기념일 행사에 맞춰 그의 시신이 알제리로 운구되었습니다. 비록 유해로 돌아왔지만 알제리 사람들은 에미르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합니다. 에미르는 유해는 '엘 알리아'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2년 후인 1968년 독립기념일 행사에 알제리에서 가장 유명한 부고 광장에 압델카데르 청동 승마상이 세워졌습니다.
P.S.
다음 시간에는 알제리 초대 대통령 '벤 벨라' 의 독립투쟁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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